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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서울역사박물관, 시흥동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 발간

시흥(始興)의 원조는 금천구 시흥동!

 

(비씨엔뉴스24) 서울역사박물관은 2023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결과를 엮어『시흥동, 서울 서남부 전통과 현대의 중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0일 밝혔다.

 

2007년부터 진행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대표하는 조사 연구 사업이다. 뉴타운 사업 대상지였던'보광동'을 시작으로 이번 '시흥동'까지 총 41개 지역 조사를 완료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흥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시적으로 살펴보며 경기도 시흥시에 가려져 있던 금천구 시흥동을 선명히 드러냈다.

 

금천구 시흥동은 ‘시흥’이라는 지명과 땅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곳이다. 역사 속에서 시흥은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이 시흥현(始興縣)으로 바뀌면서 등장했다. 현재의 시흥동은 일제강점기 시흥군 동면 시흥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1963년 1월에 서울시에 편입됐다.

 

구로구 동부와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시흥현과 시흥군이던 시절 지금의 시흥동 지역은 시흥관아, 시흥행궁, 시흥군청이 소재하는 중심지였다. 하지만 서울 편입 이후에는 서울의 외곽 지역으로 그 위상이 많이 축소됐다. 1989년에 경기도 시흥시가 분리 독립되면서 동일한 지명으로 인한 혼란이 가중됐다.

 

시흥동은 조선시대 정조의 화성 능행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 충청·전라·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근대 시기 육상 교통망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도 서울과 지방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서 국도 1호선과 경부선 철도가 모두 시흥동을 통과했다. 현재도 지하철 1호선과 왕복 10차선의 시흥대로가 지나며 KTX광명역과 서부간선도로·서해안고속도로가 인접해 서울과 경기 서남부를 연결하는 주요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시흥동이 본격적으로 도시화하기 시작한 건 1968년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시흥동은 서울시 내에서도 비교적 토지구획정리가 빠른 편에 속했는데, 이는 시흥동이 경부선을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1966년 수해로 발생한 2,500여 가구의 이주정착지 중 하나로 시흥동을 선택했다. 시흥동 산 91번지 일대 시유지 6만 7,000여 평에 3,404가구 1만 3,800명이 이주했다. 시흥동 수재민 정착촌은 길을 경계선 삼아 마포, 영등포, 성동구 등 지역으로 구획됐다. 수재민들에게는 4가구당 1개의 대형 천막이 보급됐을 뿐이었다.

 

수재민 정착촌에서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며 ‘인분비’라는 명목으로 매달 50~150원의 사용료를 내야 했다. 1970년대에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난 인구에 공동수도가 단 58개에 불구해 급수가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때문에 급수차가 오면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공동수도에는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1970년대 토지구획정리와 함께 택지가 개발되며 시흥동은 본격적인 서울 외곽 주거지로 변모했다. 그리고 1987년에 수재민 정착촌이 위치한 시흥2동 재개발 추진 계획이 발표돼 1992년에 벽산아파트로 탈바꿈했다. 현재 시흥동은 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를 경계로 대상지 안쪽의 연립주택과 바깥쪽의 아파트단지가 양분화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1977년에 '수도권 인구재배치 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서울시는 교통 혼잡과 각종 공해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에 즐비한 공구상가를 ‘도심부적격업소’로 규정하고 도심 밖으로 이전을 추진했다.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갖추고 수원·안양·안산·인천 등지의 공업지대와 인접한 시계(市界)에 위치한 시흥동은 산업유통시설에 입지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987년에 시흥대로를 중심으로 서편에 시흥산업용재유통센터, 동편에 중앙철재종합상가가 형성돼 서울 서남부 상공업 중심지로서 발달해 왔다.

 

1911년에 개교한 서울시흥초등학교는 1905년에 시흥의 유일한 서당이 근대적 교육시설로 변화한 것이다. 개교 당시 시흥초등학교는 당시 시흥군의 관할이던 지금의 광명시·안양시뿐만 아니라 멀게는 과천시까지도 포괄하는 방대한 학구(學區)를 형성하고 있었다. 현재 시흥동과 일대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는 시흥초등학교에서 분리 개교한 것이다.

 

1904년 시작된 시흥교회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14번째 교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흥동에 자리한 시흥교회는 지역사회와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6·25 전쟁 중에는 유엔군이 시흥초등학교 교사에 주둔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조회나 졸업식 같은 행사를 시흥교회에서 치렀다. 1967년에 예배당을 신축할 때에는 시흥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와 기아산업, 대한전선이 시흥교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